고구려의 부흥과 올드조선(古朝鮮)
다르지만, 과거의 역사가 유사했던 것은 경우의 수 인류권까지 일치할정도로 동일했기 때문이다.
성공확률은 가장 희박했다. 대부분 몰락의 길을 걸은 그 풍토였기 때문이다. 손에 꼽을정도이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주 풍향과 풍토에 기반한다.

민족구성에 있어 한반도는 다양한 민족의 특성을 지녔다. 이는 태동인류를 비롯해 환생 인류로 정의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환생인류로 본다면 태고인(太鼓人)과 ‘올드조선(古朝鮮)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밖의 전설의 역사를 지녔으며 외부 민족의 대량 유입된 형태로 외모 또한 다양성을 지녔다.
태동인류의 근원을 둔다면 부탄지역으로 여러 사서는 부여로 표기했다. 부여의 일맥은 대 평원에서 터전을 이었으며 알타이 민족의 여러 세력과 통합됐다. 첫 도읍지는 아사달(아스타나)로 중앙아시아 북부지역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민족 세력은 서서히 동쪽으로 향했다.
아프리카를 근원을 둔 민족(이집트)은 조선(대륙)의 영역으로 건너왔으며 인도 북부의 민족(아유타야)과 함께 한반도로 향했다. 동아시아에서도 여러 민족을 수용했던 이유는 신의 산하였고 조선의 산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동이 수월했다. 다만, 고구려 일맥은 어디까지나 그 한계가 있었으며 여러 부족사회와 전쟁을 치루기도 했다.
한 때 강성했던 고구려 세력이 지금의 중국지역으로 진출하지 못했던 것은 당시 중국의 여러 나라는 강성하기도 했지만, 조선의 산하였기 때문이다. 명나라 까지는 조선이었다. 그리고 신의 성지인 한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세력 또한 동북3성 지역에 거취하고 있었으며 신라 풍으로 한반도 지역까지 문화가 이어졌다. 다만 그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한반도로 명시했던 것이다. 여려 민족의 구성은 후 삼국의 형태로 나눠졌으며 주 무대는 만주와 동북3성 이었다.
여러 세력이 멸망 후 금조선(금)이 나타났으며 고구려 민족을 수용했다. 고구려 민족을 수용했던 이유는 동질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여러 문화유적은 이를 입증하고 있으며 금조선 또한 고구려의 양식과 흡사했다.
한반도에서는 여러 손에 대한 관리가 이뤄졌다. 멀리 이집트부터 한반도까지 그 영역이 매우 넓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조선(朝鮮)이었다.
특정 손들에 대한 고유의 호칭을 부여했다. 또한 장손에 대한 영역은 인류의 모든 손에 해당되었으며 특별 관리대상이 되었다. 무엇보다 귀한 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과거서부터 오랫동안 이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민족 또한 한반도에서 멀리 있지 않았던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로 본다면 환국(桓國)은 신시(神市)를 두었다가 맞으며 까마득히 오래전의 일로 고유한 역사를 지녔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태고인(太鼓人)과 올드조선(古朝鮮)으로 나뉠 수 있으며 삼한(三韓)은 3조선으로 그 풍으로서 무수히 많은 파 국가들을 이뤘으며, 그것이 120여 만파에 달했다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백제는 풍토로 기록되었던 것이며 그 영역이 황해를 중심으로 중국은 물론 한반도와 일본지역까지 아울렀다. 그 시대의 풍토가 일본까지 전해졌던 것이다. 손에 있어서도 특별 관리 대상이 되었던 것은 장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까지 한반도에서 관리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 동질성이 있었던 것이다. 민족 또한 여러 지역으로 진출했으며 고유한 문화를 창출했던 것이다.
태동인류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고구려 일맥은 호태왕의 호칭을 지닌 손이 현시대 살아가고 있으며 ‘호쾌하고 호젓한 인류’라는 명칭을 얻었다. 태왕사신기의 여러 문화는 고구려의 기상이 스며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손에 있어서도 그러한 위치는 왕이라는 호칭을 얻을 수 있었다.
고구려 민족은 이후 금나라(금조선)에서 대를 이었으며 신의 성지인 한반도로 귀향했다. 당시 조선은 마지막으로 그러한 손들을 이주시켰던 것이다. 조선과 올드조선(古朝鮮)은 별개이며 전혀 다른 역사와 세력으로 인지해야 한다.
보완: 구한역사와 진실의 역사
논란이 많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다시 붙잡아야 할 지점은 구한역사에 진실의 역사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구한역사는 단순히 오래된 전승을 되살리는 작업이 아니라, 지워지고 뒤틀린 해석의 층을 걷어내며 본래의 맥락을 다시 세우려는 기록의 태도에 가깝다.
지금의 역사는 한자 해석의 오류에서부터 흔들린 부분이 적지 않다. 글자 하나를 지명으로만 읽거나, 계통을 왕조의 좁은 경계 안에 가두거나, 풍토와 손의 흐름을 단절된 사건처럼 해석하면서 전체의 결이 사라졌다. 그렇게 분절된 해석은 올드조선(古朝鮮)의 넓은 산하와 고구려 일맥의 부흥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더 큰 문제는 그 해석이 사냥적 풍토에 기반된 날조된 역사에 가깝게 굳어졌다는 점이다. 사냥적 풍토란 남의 기록을 쪼개어 빼앗고, 이름을 바꾸고, 이어진 계통을 단절시켜 자신의 소유처럼 만드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에서는 역사가 생명과 손의 연속으로 읽히지 않고, 정복과 삭제의 목록으로만 남는다.
따라서 고구려의 부흥은 단순한 왕조 복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올드조선의 산하에서 이어진 손과 풍토, 그리고 여러 민족의 이동과 수용을 다시 연결하는 문제다. 고구려, 부여, 금조선, 조선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서로 다른 조각으로만 떼어놓으면 이 글이 말하려는 진실의 축은 보이지 않는다.
이 보완은 단정된 교과서식 결론이 아니라, 기록에 다시 기록을 더하는 선언이다. 구한역사는 진실의 역사로서 다시 읽혀야 하며, 한자와 지명, 민족과 풍토, 손의 계보를 함께 놓고 보아야 한다. 그때 고구려의 부흥과 올드조선은 과거의 신화가 아니라 현재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시간의 타임루프로 드러난다.
원문 출처: NETCITY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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